민세 안재홍의 주요 활동

○ 민세 안재홍의 생애

민세 안재홍은 1891년 12월 30일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두릉리에서 순흥안씨 안윤섭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재를 인정받으며 한문수학을 하다가 1907년 17세에 평택의 사립 진흥의숙에 입학하고 이어 서울로 유학가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던 해 동경으로 가서 이승만등과 접촉하였고 1911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며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했다.

1913년 상해-북경-심양 등을 여행하고 해외 독립운동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국내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1914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육당 최남선의 소개로 1915년 중앙학교 학감이 되었다. 1915년 실력양성을 목표로 만들어진 “조선산업장려계”회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17년 중앙학교 학감을 사임하고 이해 “중앙기독청년회”교육부 간사로 재임되었고 대종교 신자가 되었다.

1919 년 5월 서울에서“대한민국청년외교단”비밀조직에 참가하였으나 11월 대구에서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요양을 하다가 1924년 4월“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하여 토산장려의 논리를 전개하며 제국주의 시장의 논리를 거부하고 외화배척운동과 소공업 민족자본 하층의 이해를 대변하였다.1924년 5월 5월 최남선이 사장으로 있던“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입사하였으나 보천교가 개입하여 일어난 분규로 퇴사하고 1924년 신석우가 새로 인수하고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여 새롭게 출발한 조선일보에 주필겸 이사로 입사하였다. 1932년 퇴사할때까지 사설 약 980편 석간의 시평 약 470편을 써서 평균 10일에 7편의 사설과 시평을 집필하는 경이적인 정력으로 종횡무진의 필봉을 휘둘렀다.

1925년 4월 조선기자대회에서 부이장으로 피선되었고, 비밀결사조직인 흥업부락부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9월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이 회의를 조선에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조선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조사,연구하는 <조선사정연구회>조직에 참여하였다. 1926년에는 민립대학 기성운동에 재계대표로 선정되었고, 1927년 1월 좌우합작의 민족운동단체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최초 협동전선이었던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안재홍은 <연정회>등이 조선인 상층자본가들의 자치운동으로 일제에 타협하는방향으로 흐르자 이러한 자치운동에 한계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좌우협동운동체 건설을 주창하였다. <신간회>는 절대독립을 추구하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자치운동을 분쇄하고 민중의 정치,경제적 각성을 촉진하며 전민족의 단결을 꾀하고자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였다. 안재홍은 <신간회>를 발기하는데 앞장섰을뿐 아니라, 당시 중국에 있던 신채호선생과 연락하여 신채호선생을 발기인으로 참여케하였으며 <신간회>총무 간사로 활동하여 사실상 <신간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9월에는 <조선일보> 주필로 발행인을 겸하였으며, 1928년 <조선일보> 사설 “보석지연의 희생”발행 책임으로 편집인 백관수와 함께 구속되어 제2차 옥고를 치뤘고, 1928년 5월에는 조선일보 사설 “제남사건의 벽상관”의 집필로 구속되어 조선일보 발행인에서 물러나고 금고 8개월의 제3차 옥고를 치뤘으며 이때 조선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다.

1929년 1월 만기 출옥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으며 1929년 3월 색의단발, 건강증진, 상식보급, 허례폐지, 소비절약등 5가지 과제를 가지고 생활개신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그 해 7월 조선일보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아래 한글 원본책을 배포하며 문자 보급운동을 전개하였고 이것은 동아일보사의 “브나르도운동”과 함께 일제치하 대표적인 민중 계몽 운동이었다.

안재홍은 교양운동을 첫째로 조직운동을 두 번째로 투쟁운동 세 번째로 생각하여 교양운동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생활계신운동과 문자 보급운동은 안재홍의 이념을 반영한 문화운동이었다. 1929년 12월 민중대회사건으로 구속되어 제4차 옥고를 치렀고, 1930년 불혹의 나이에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 관견”을 연재하였다. 안재홍이 우리 고대사에 집중 관심을 보인 이유는 고대가 한국민족의 형성과 영토의 확장등 민족의 번영을 누리던때였으므로,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이 가장 심하게 왜곡하였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안재홍은 한국사의 타율성을 내세우는 식민주의 사관에 대항하여 한국사의 자율적,내재적 발전을 주장하였다.

1931년 조선일보사의 재정난이 좀처럼 풀리지않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석우의 뒤를 이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1931년 10월 “만주동포 조난문제 협의회”조직에 참여하여 조사선전부 상무에 피선되었고, 1932년 2월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도 민족의 영향을 결집한 합법단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민족단체 통제협의회>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2년 3월 만주동포 구호 의연금을 유용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구속되어 제5차 옥고를 치르고 나와 ‘조선학운동’이라는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재홍은 조선학운동을 “차선적인 최선--아니 최선한 차선책”으로 규정하여 힘차게 운동을 전개하였다.1934년에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논문도 발표하였다. 안재홍은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 교호되고 조합되는 민족적 국제주의, 국제적 민족주의를 형성”하자는 주장을 하였고 이러한 의미에서 안재홍이 추구하는 <조선학운동>의 현실적 목표는 민족의 통합 단결이 우선하는 식민지조선의 특수성을 전재하여 계급혁명을 반대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할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만드는데 있었다. 안재홍은 그것을 제3 신생적, 민세주의라고 규정하였다. 안재홍은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면서 그를 국가적 사회민주주의자로 규정하고 다산의 산업적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 경제균등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1936년 군관학교 사건으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제6차 옥고를 치렀고, 1938년 5월 흥업부락부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제7차를 옥고를 치렀고 1938년 군관학교 사건으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제8차 옥고를 연이어 치렀다. 1939년 출옥하여 고향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두릉리에서 한국상고사 관련 저술과 조선통사를 집필하였다.

1942년 12월 일제가 의도적으로 꾸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남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어 제9차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안재홍의 마지막 옥고였지만 심한 고문으로 너무 고통스러워 감옥에서 순국을 결심하고 절명시를 쓰기도 하였다. 1944년 가을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민족주의 조직을 결성하려고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고 1944년 12월 일제 핵심 지도부와 시국 수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몽양 여운형과 함께‘민족자주’,‘호양협력’,‘마찰방지’의 3원칙을 제시하였으나, 일제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이때부터 안재홍은 일제의 암살위협을 받아 서울시내에서 도피 은신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직에 참여하여 그 부위원장으로 독립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과도적기구를 통하여 국내 치한을 유지하고 건국사업의 기초를 닦는 일에 노력하였다. 1945년 9월 건준탈퇴성명서를 발표하고 <중경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건국정부 수립방안을 제시하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구체화한‘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를 지향하는 것으로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급좌와 급우의 계급독재를 부정하며 노동자와 자본가의 협조를 포함한 계급통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재홍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우리 한민족의 진로가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를 건설하여 전민족의 해방 및 독립의 완성을 꾀하는 것이 역사의 명제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민족내부의 모든 계급 대립을 해소하고 경제균등을 바탕으로 정치, 교육, 문화의 평등을 실현한 만민공생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안재홍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기 식별이라고 단언하였는데 경제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순수 사상으로서 공산주의는 인정하였지만, 계급투쟁 무산독재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체제는 반대하였다.

1945 년 9월 국민당을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그 정당에서 급좌 급우를 모두 배격하고 국력을 통합하여 신민주주의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국민당을 창당한 의도가 이승만,김구,김규식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들어오면 이들 가운데 어느 한사람을 당수로 삼아 이들의 일부 또는 총망라한 일대 민족정당을 만들려는 것으로 특히 김구의 중경임시정부를 영입하고 이를 보강하고자 하였다.

1946년 1월 신탁통치 반대운동 국민 총동원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하였고, 한성일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3월 20일 국민당과 김구의 한독당이 합당하였고, 1946년 7월 11일 좌우합작 교섭대표 10인 가운데 우측대표로 선임되었다. 안재홍은 좌우합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만약 좌우합작으로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못하면 극좌와 극우의 갈등으로 한국은 내란적 항쟁으로 동족에게 피를 흘리는 참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계하였는데 불과 몇 년후 마침내 남북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고 말았다. 1947년 2월 민정장관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건국에 정치, 경제, 토지, 행정제도등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1947년 <조선상고사감> 상권을 간행하였고,1948년 4월에는 <조선상고사감> 하권을 간행하였다. 1948년 6월 민정장관을 퇴임하고 <한성일보> 사장으로 복귀하였으며 같은해 9월 민족계몽운동 단체인 <신생회>를 설립하여 신생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10월에는 부산등 5대 도시에서“한민족의 진로”라는 강연을 통해 건국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다음해 5월“한민족의 기본진로:부제-신민족주의의 건국이념”을 발간하였다. 1949년 1월 좌우합작을 위해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영수회동을 주선하였으나 실패하고 그해 5월 <대종교>의 정교와 원로원 참의에 피선되어 대형의 칭호를 받았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같은해 9월 한국전쟁시 북한군의 납북되었다.1956년 납북인사중심의 “평화통일 협의회”최고 위원으로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1965년 3월 1일 75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안재홍의 장례는 벽초 홍명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치러졌으며, 그 해 12월“안재홍 유고집”이 유언에 의해 간행되었다. 남한에서는 1965년 3월 9일 서울 진명여고 강당에서 9일장으로 유해없는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안재홍의 일제하 독립운동의 업적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91년 <국립 현충원>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모셔놓고 있다.

○ 주요업적

1.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언론인

- <시대일보> 논설기자(1924.5~9월),<조선일보> 주필(1924.9~1928), <조선일보> 부사장 및 사장(1929~1932),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1935~1936), <한성일보>사장(1946~1950)등을 역임하며 당대의 으뜸가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4세 되던 1924년이후 그의 항일민족운동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해서 표현된다. 1924년 5월 민세는 3.1운동으로 징역을 살다가 출옥한 최남선이 사장으로 있던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해 9월 <조선일보> 주필겸 이사로 입사했다. 조선일보는 원래 친일주의자였던 조진태가 중심이되어 만든 신문이었다. 그러다가 매국단체 일진회 회장을 지낸 송병준이 인수하여 경영했지만 수지가 맞지않자 신석우에게 팔았 고, 신석우를 새로 사주로 맞게된 조선일보는“조선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 아래 그 지면의 일대 쇄신을 단행하고 민중진영의 신문으로 일신된 면모를 갖 는다. 이후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민족운동사상 서로 상의한 인맥을 형성하면서 주요시기마다 경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언론기 관으로 성장했으며, 안재홍은 조선일보의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이었다.

민세의 언론인으로서의 항일활동은 1920년대 한국민족운동을 대표할수 있을만큼 그 정신에 확고부동했고 매우 끈질기게 그리고 정력적으로 전개되었다. 시대일보에 쓴 논설 “그러면 조선인아―제군은 이 개벽이 있느냐”,“살기에 쌓인 문화정치”, 조선일보 시절의 논설“통곡하는 군중 속에 서서”,“제왕 의 조락”등의 논설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 사설“보석지연의 희생”으로 제2차 옥고, 1928년 5월 조선일보 사설“제남사건의 벽상관”으로 제3차 옥고를 치렀다. 1930년대에는 생활 개선운동을 전개하고 문자 보급운동을 벌였으며 이러한 운동은 후에 실력양성운동에 큰 힘이 되었던 농총계몽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이루었으며, 문맹퇴치의 목적과 함께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재홍은 해방후에도 <한성일보> 사장으로 좌우합작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언론을 통해 많은 사설과 논평으로 시대정신에 투철했던 민족 지성이었다.

2. 일제 강점기 국내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

- 안재홍은 1919년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독립결사단체인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1927년 좌우합작의 민족 유일 당 운동 단체인 <신간회>운동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신간회>초대회장에는 조선일보 이상재가 피선되었고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안재홍은 <신간회>총무간사로 활동했으며, 홍명희는 조직간사를 맡았다. 안재홍을 비롯한 <신간회>의 주요인물은 이 조직의 전국적인 확대를 위해 각 지역의 <신간회>지구를 창설키로 하고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다. 안재홍은 주로 경기도와 평안도지역을 순회하며 효과적인 항일운동의 전개를 위한 민족대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안재홍은 <신간회> 광주학생 사건 진상보고 민중사회 사건, 만주동포 구호 의연금 관련 사건,군관학교 사건, 흥업부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연이어 투옥되었으며 일제하에서 9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거목으로 평가 받는다.

3.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신민족주의 역사학자

- 안재홍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신민족주의 역사학자로 알려져있다. 민세는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에 대항하고 민족의 역사연구와 서술을 통해 독립자주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의도에서 1930년 1월부터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관견>을 연재했다. 이것은 후에 책으로 발간된 <조선상고사감> 상,하권과 <조선통사>의 기초가 된 연구로 단군이래 조선민족의 역사를 문화적 특수성과 강인하고 끈질긴 조선민족의 생활력 그리고 민족의 대외투쟁사 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4년 민세는 다산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 전서>를 위당 정인보와 함께 교열하기 시작했고, 1938년 완간했다. 다산 정약용의 옛집은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있었는데 1925년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 이 책이 없어질뻔했는데 어떤 유지가 이것을 간행키위해 베껴두었다.10년이 지난후 위당 정인보와 민세 안재홍이 4년동안 교대로 교열하여 총 76책으로 간행되어 실학연구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1937년 이후 민세는 고향 평택의 두릉리에 칩거하면서 조선상고사감을 집필했다. <조선상고사감>에는 기자조선고, 부여조선고, 불함문화론이 포함되어 조선 역사와 조선철학 및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했다. 또한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작업의 수정위원으로 참여하여 한글보존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4. 좌우합작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에 헌신한 정치가

-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국내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일제가 패망할때에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인물로 해방후에는 좌우합작의 민족통 일국가 수립에 헌신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안재홍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조선 건국준비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국민당 당수, 좌우합작위원회 우측대표, 미군정청 민정장관,제2대 국회의원 등으로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 수립에 헌신했다.

5. “신민족주의론”을 주창한 사상가

- 민세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전후 민족의 장래를 제시한 대표적인 정치사상으로 평가받는다. 낡은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만민 총언“대중공생”의 새로운 민족통합의 이념으로 제시한 “신민족주의론”은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이상적인 한민족 공동체의 바른 방향을 제시한 이념으로 평가받고 있다.

○ 민세 안재홍에 대한 각계인사의 평가

“민세 안재홍 선생은 민족 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역사가로, 정치인으로 그 분야마다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절의 국사였다. 우리의 풍토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민족의 살길을 찾으려고 고심한 그 독자적인 사상, 외세 강점 전후 9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른 그 도저한 행동, 이 모든 것이 선생의 상을 우리 현대사에 흔치 않은 민중지도자의 한분으로 부각케 하고 있다.”
- 사학자 천관우 선생
“그는 천성이 학자이다. 언론이어서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야심이 없던 그는 민정장관이 되고서도 다른 정치인들처럼 자리를 이용해서 정치자금을 마련하든가 자파 세력을 부식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거짓이 없고 순정한 인간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민족지도자로 존경 받기는 했으나 한국적 정치 풍토에서 정치인이면 으레 몸에 지니고 있어야할 권모와 술수, 당략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일제 수난기와 해방후의 거센 파도속에서 시대적 희생자로서 인생을 마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 언론인 송건호 선생
“분단이 점차 심화되는 상황에서 체제의 일질화를 바로 잡자는데 누구나 동의했지만 그 방안은 놓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폈다. 그 중 편향성을 극복하고 대립을 넘어서는 노선을 찾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을 “민족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조소앙 선생과 안재홍 선생이야 말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서울대 조동일 교수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에, 그리고 해방 3년의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그들 가운데 인격적으로 고결했고 학문적으로 심오했으며 정치적으로 통합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민세 안재홍이었다.
- 동아일보사 김학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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